
freya's blessing
#버크섬의_봄
드래곤 길들이기 봄 합작
주최 솔잎 @fine_l2f
Bless, Days
다 소
@thatallofwelost
1.
지붕에서부터 건물 전체가 흔들리는 진동에 수면 밑으로 가라앉아 있던 의식이 천천히 떠올랐다. 몇 달짜리 한기에 절여진 낡은 목조 건물은 생각보다 쉽게 흔들린다. 팔만 움직여 담요를 턱 밑까지 끌어올렸다. 새까맣게 점등된 시야와 잠결에서 벗어나지 못한 정신으로 아직 살벌한 늦겨울의 한기를 느낄 찰나, 기상을 재촉하듯 들려오는 울음소리에 천천히 눈을 떴다.
나무 침대에 누운 채 팔다리만 밖으로 뻗어 사지가 늘어날 듯 기지개를 켰다. 몽롱한 정신이 현실로 돌아오며 활짝 열린 머리 위 창문으로 들어오는 한기가 한층 옅어짐을 느낄 무렵, 다시 한번 온 집안을 흔들어대는 진동 탓에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알았어, 알았어. 일어났으니까 이제 그만 해. 아빠가 싫어하신단 말이야.”
히컵은 의자에 걸쳐둔 조끼를 챙겨 들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스토익은 집이 흔들리는 걸 어지간히도 싫어했다. 때문에 투슬리스가 자꾸만 비행하러 가자고 아침마다 지붕을 흔들며 졸라대는 걸 만류하느라 꽤 고생했지만, 결국 히컵의 노력은 무로 돌아가고 말았다. 본래 바이킹의 고집만큼이나 드래곤의 고집도 억센 편이다.... 누가 먼저 그런 말을 했더라?
다리를 바삐 움직이며 조끼를 입었다. 입에서는 하품이 한 번 튀어나왔다. 이리저리 손가락을 놀리며 정신이 겨우 제대로 돌아왔을 무렵 눈이 잔뜩 쌓인 암석 위 목재로 지은 집, 위에서 한참 몸을 움직이던 까만 바탕의 녹색 눈과 시선이 맞물렸다.
“좋은 아침, 투슬리스.”
히컵과 눈이 마주치자 투슬리스는 지붕에서 눈밭 위로 뛰어내리며 날개를 한 번 휘젓고, 꼬리를 잔뜩 흔들다가, 입을 움찔거리고 웃으며 머리를 자꾸만 히컵의 팔 아래로 들이밀었다. 턱 밑을 잘게 간질여주면 고양이 같은 낮은 울음소리를 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웃었다. 좋은 아침, 히컵, 이라고 말하듯이.
“너 말야…, 매일 지붕째로 흔드는 걸 고칠 생각은 없는 거지? 네가 빨리 날고 싶은 건 나도 알지만….”
히컵은 마른 목을 한 번 가다듬은 뒤, 손은 계속 투슬리스의 얼굴 밑에서 바삐 움직이며 말을 이었다.
“아빠가 싫어하신다고. 잘못하면 너 혼자 훈련장으로 쫓겨나는 수가 있어.”
당부하듯 손가락까지 흔들며 말했건만, 투슬리스는 그러거나 말거나 빨리 나가자는 태도였다. 히컵의 곁을 뱅글뱅글 돌던 투슬리스는 천천히 암석 절벽의 끝으로 다가가 섰다. 뒤를 돌아보는 얼굴은 개구쟁이 어린아이 같다.
황소고집이라면 버크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히컵이지만, 그의 단짝답게 투슬리스 역시 고집이 여간 센 편이 아니었다. 하나의 상황을 두고 의견이 다를 때면 종국에는 히컵에게 맞춰주는 쪽이었으나 결국 긍정의 대답을 내놓을 것이 뻔한 상황에서는 나서서 이끌어가거나 뻔뻔하게 행동하기도 했다.
“알겠다는 거지? 나중에 아빠가 너 때문에 잔소리하시면 그때는 나도 네 편 못 들어줘.”
끝까지 대답을 요구하는 말에 장어라도 씹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좌우로 까딱였다. 망할 파충류···. 중얼거렸으나 작게 속삭였으니 듣지 못했을 테다. 히컵은 목소리를 바꿔 말했다.
“넵, 다 됐고 비행하러 가시죠. 투슬리스, 가자!”
히컵을 태운 투슬리스의 까만 몸이 번개처럼 하늘로 솟아올랐다. 의족과 페달이 맞물리는 소리가 귓가를 스쳐 가고, 급작스레 비상하는 몸을 따라가지 못한 공기층이 바람을 일으키며 히컵의 어두운 밤색 머리칼을 온통 흩트렸다. 아직 사라지지 않은 칼바람이 목덜미를 건드리고 지나갔다. 크게 숨을 들이켜면 구름 위의 잔잔하게 얼어붙은 공기가 폐에 가득 맺혔다가 내쉼과 동시에 빠져나갔다. 어쩌면 겨울에 정신을 차리는 용도로는 찬물 세수보다도 더 효과가 좋았다. 전속력 달리기만 계속했다면 절대 몰랐을 것이다. 온몸이 뼈째 얼어버릴 듯한 겨울의 유일한 좋은 점과, 하늘을 날아다니는 기분까지도.
대대로 바람 잘 날 없던 버크 섬이 평화를 얻은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북쪽의 끝에서 괴물이자 악몽으로 불리는 ―그때는 그랬었다― 드래곤들과 끝없는 전쟁을 치르며 그들의 선조는 살아남아 왔다. 스토익의 선에서만 생각해도 그렇다. 그러다 말라깽이 히컵이 태어나고, 나이트 퓨리를 만나고, 그들과 친구가 되며 상황이 뒤집힌 것은 얼마 전의 이야기다. 그야말로, 극적인 화해였다. 물론 투슬리스와 어울렸다는 사실을 처음 아버지에게 들켰을 땐 정말로 의절하게 되는 줄 알았지만. 히컵이 옅은 웃음을 뱉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잔잔한 기쁨이었다.
파랗게 잠든 하늘을 가로지르던 몸이, 힘을 놓음과 동시에 뒤집혀 아래로 떨어진다. 서로 마주 보는 구도가 되자 짧고 큰 손이 어깨를 두어 번 건드렸다. 스노글터그 이후 터득한 장난 중 하나다. 히컵의 얄쌍한 몸이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자, 그 모습을 보며 투슬리스가 킥킥대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윽고 다시 안장에 배를 맞대자 바로 아래서 넓은 날개가 뻗어나가 바다 한가운데 곤두박질치기 직전에 멈췄다. 가죽 안장 위에 바짝 엎드려 수면 위를 낮게 스쳐 갔다. 손을 아래로 내리면 피부에 닿는 찬 물결이 기분이 좋다. 손가락 사이로 깊게 고인 바다가 파고들고, 가볍게 잠긴 손을 튕기니 투슬리스가 고개를 흔들며 다시 한번 위로 비상했다.
“저것 봐, 벌써 꽃이 피었네.”
코끝을 간질이는 바람은 어느새 봄의 기운을 품은 채고, 머리 위에서 내리쬐는 햇살도 제법 따뜻하다. 바람과 볕으로 가득 찬 공허를 가르고 날면 암석의 끝자락에 더듬더듬 피어있는 이름 모를 이른 봄꽃이 보인다. 척박하기 그지없는 버크에서 꽃이라니. 히컵은 옅은 미소를 띤 채 암벽 틈 사이 고개를 내민 푸르스름한 들꽃 한 송이를 바라보았다. 일 년에 절반이 넘는 기간 동안 하늘이 찢어져라 눈과 우박이 떨어지는 버크에도 봄의 향기가 맴돌기 시작했다.
“이제 날씨도 점점 따뜻해질 거야. 그럼 더 많이 날 수 있을 거고.”
너도 그게 좋지?
히컵의 말에 투슬리스가 대답하듯 낮은 목소리로 그르렁거렸다. 등에 박힌 까만 비늘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아침마다 습관처럼 행하는 짧은 비행 산책은 아무리 해도 기분이 좋았다. 한바탕 난 뒤 땅 위로 내려온 투슬리스는 히컵이 등에서 내려오자 팔다리를 앞뒤로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산책이 끝나면 수평선 위로 머리만 내밀었던 태양이 벌써 하늘 위에 걸려있었고, 잠들었던 사람들도 하나둘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이킹식 표현을 빌리자면, 아침 먹기 딱 좋은 시간이다.
“안녕, 히컵, 좋은 아침.”
“좋은 아침, 아스트리드.”
얼굴만 한 양동이에 물을 길어가던 아스트리드가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또래 중에서도 가장 부지런하고 강하다는 어른들의 이야기답게 그는 벌써 분주히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코끝과 닿을 것 같이 길게 내려온 앞머리 뒤로 푸른 눈과 눈이 마주쳤다. 아닌 척 그 눈동자를 조금 오래 바라보았다.
“뭘 그렇게 봐?”
“별로, 아무것도 아냐.”
“그럼 됐고. 아까 족장님이 너 찾으시더라.”
“세상에. 눈 뜨자마자 하늘 마실 나갔다고 한 소리 들으려나?”
지겹다는 듯한 표정으로 또? 를 말하자 아스트리드는 하하 웃으며 어깨를 으쓱이고 지나갔다.
폭풍이 지나 봄이 찾아온 버크는 평화롭다. 그리고 따스하다. 히컵은 레드 데스와의 결판으로 얻어낸 새로운 일상을 뿌듯하게 바라보았다. 많은 게 변했고 또 많은 게 그대로였다. 사람들은 드래곤을 받아들였지만 모든 사람이 그런 건 아니었다. 아마 제대로 된 화합에는 더 많은 시간이 요구될 것이다. 히컵의 몸도 마찬가지였다. 의족에 적응하는 데에는 꽤 긴 시간이 걸렸지만 결국 해가 지나기 전에 본래 제 몸인 것처럼 다룰 수 있게 되었음에도 여전히 스토익은 히컵의 행동에 조마조마해했다. 변함없이 단호한 성격을 앞세운 탓에 티가 나지 않아 본인은 몰랐겠지만, 결과적으로 잘 해결됐으니 된 거였다.
히컵은 더 이상 고버의 대장간에 출석 도장을 찍지 않아도 되었지만 하루 종일 투슬리스와 붙어 다니며 또래들과 작당 모의를 하거나 스토익의 여러 심부름을 하다가도 주기적으로 대장간을 찾았다. 이제 진득하게 붙어 앉아 도와줄 일손이 줄었다며 고버는 투덜댔지만, 투슬리스와 함께 날며 웃는 히컵을 보면서 얼굴로 번져가는 미소를 감출 수는 없었다.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척박하기 그지없는 버크에, 꽃이라니. 폭풍이 지나가자마자 날이 개어버리다니 말이야.”
“고버 자네, 그 말은 봄이 올 때마다 하는 것 같네만.”
스토익의 말에 고버는 쩝, 멋쩍게 침을 삼키더니 왼팔의 갈고리로 수염을 빗었다. 그새 엉킨 몇 가닥이 갈고리 날에 걸려 팽팽해지다 곧 끊어졌다. 아야야... 살살 뺨을 쓸어내리는 모습을 보며 짧은 한숨을 내쉬는 것은 스토익의 몫이었다.
“저번 스노글터그에 이어 프레야 축제까지 드래곤과 함께라니! 오딘께서 뭐라고 생각하실까.”
“내 생각에, 오딘께서는 아무 생각 없을 걸세. 선대들이야 미치고 팔짝 뛰겠지만…. 결국 현재는 그들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으니, 뭐, 결론적으로는 아무 문제 없는 것 아니겠어?”
아아, 그렇지. 확실히 그래. 스토익은 만족의 미소를 얼굴에 띤 채 마을을 바라보았다. 섬은 축제 준비의 막바지에 다다라 제법 분주했다. 땅 위로 저마다 먹을 것과 장식품을 이리저리 나르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맴돌았고, 그 위로 목재 더미를 옮기는 그롱클과 핫버플이 저마다의 날개를 흔들며 언덕에서 언덕으로 넘어갔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머리 위로 구름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불쑥 나타난 히컵이 투슬리스의 등에서 내려오자마자 종종걸음으로 달려왔다.
“아빠, 찾으셨다고요? 아스트리드한테서 들었어요.”
“그래, 아들아.”
스토익은 온화한 얼굴로 히컵을 맞이했다. 둘의 그림자로부터 두어 걸음 뒤에서 짧은 팔로 머리를 문질러대는 투슬리스는 대화의 내용 같은 건 조금도 궁금하지 않은 듯했다.
“보아하니 네 친구와 아침부터 소풍을 다녀온 모양이구나.”
스토익의 말에 히컵이 어깨를 으쓱였다. 수많은 드래곤을 이끌고 버크로 돌아온 날부터, 어쩌면 그로부터 더 뒤인 히컵이 의족에 적응하고 드래곤과의 일상에 익숙해진 순간부터 스토익은 그들과 관련된 일을 히컵에게 맡겼다. 그러한 행동에는 히컵이 허구한 날마다 투슬리스와 가만히 하늘을 날아다니는, 의미도 중요성도 없는 일을 그만두고 자신과 함께 섬의 일에 조금 더 신경 쓰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었으나 아직 새파랗게 어린 아들에게 전해질 리 만무했다.
그렇기에 때로는 단호한 조언이 필요했다. 스토익은 고버와 주고받던 미소와 장난스런 말투를 잠시 감추고 아들의 어깨에 한 손을 올린 채 굳은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는 알고 있겠지?”
“그럼요. 프레야 축제를 하는 날이잖아요. 그것 때문에 아빠도 고버 아저씨도 줄곧 바쁘셨고요.”
“물론이다. 자그마치 여덟 달이나 말이지. 봄 축제를 위한 음식과 목재를 준비하기에 겨울은 너무나도 가혹하니까. 특히나 이번에는 더더욱 그랬지. 아무래도 버크에 예상치 못한 이웃이 많이 생겼으니 말이야. 그래도 희소식은, 네 덕에 많이 힘들지 않았다는 거다. 그보다는 초겨울에 버킷과 멜치에게 양들을 전부 마구간으로 들여보내게 시키는 게 가장 힘들었어. 특히나 버킷은 날씨가 조금만 건조해졌다 하면,”
“어…, 아빠?”
“그런 일이 있었다는 말이지. 아무튼 말이다, 히컵. 북쪽의 끝에 사는 우리에게 이번 축제는 가뜩이나 귀한 봄을 충분히 만끽할 절호의 기회란다. 여태 계속 찾아온 계절이지만, 올해는 유달리 특별할 거야.”
히컵은 스토익의 말에 웃기도 했다가, 다른 길로 빠지는 대화의 주제를 다시 원래대로 되돌리며 그의 말을 들었다. 스토익은 엄했지만 동시에 다정했다. 제 어깨조차 한 손에 쥐지 못하는 커다란 손의 온기를 느끼며, 그와 시선을 맞춘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버크에서 봄은 짧단다. 네가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마침, 우리에게도 새 식구가 생겼으니 봄과 새로운 생활을 동시에 기념하면 좋지 않겠니? 오딘께도 보여드리고 말이야. 그러니, 축제 준비를 마무리 지을 역할을 너에게 주마.”
스토익의 목소리는 점차 위엄에서 다정으로 변해갔다. 마침내 자신을 마주 보는 녹색 눈에 가만히 말을 듣고 있던 히컵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가서 사람들에게 모이라고 전해주렴. 뒷말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스토익이 등을 두어 번 토닥이자 히컵은 자신의 그림자로 딴짓하며 놀던 투슬리스에게 곧장 달려갔다. 그 모습까지도 고버는 두어 걸음 뒤에 서서 뿌듯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다녀올게요, 아빠!”
얇고도 단단한 목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공허에서 방향을 꺾어 사라지는 둘의 모습을 그들은 그저 바라보았다. 투슬리스에게서 나오는 음속 소리의 메아리마저도 사라졌을 무렵, 솔직하지 못한 아버지를 놀리는 건 장난기 가득 찬 고버의 몫이었다.
“이거 원. 자네는 여러모로 솔직하지 못하단 말이야.”
“고버? 아직 고생한 바이킹들이 배부르게 먹을 정도로 음식이 준비되지 않은 것 같은데 말이야. 이 정도로는 히컵의 날개 달린 친구가 두 입 먹자마자 끝나겠어. 불을 지필 장작도 마찬가지고.”
쓸데없는 소리 할 힘이 있으면 가서 목재나 더 가져오라고. 호통치는 목소리에 고버는 오른손을 휘휘 흔들며 자리를 떠났다.
2.
아스트리드와 아이들은 마을 구석에 모여 실랑이로 다섯 번째 대련 중이었다. 따지고 보면 아스트리드와 소스턴 쌍둥이들이 대화의 대부분을 차지했지만. 피쉬레그와 스나웃라웃도 별 소득 없는 다툼에 고개를 흔들며 자리를 떠나기는 무슨, 못 박힌 듯 서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으니, 말장난과 완전히 무관한 것은 아니었다.
“프레야는 사랑과 풍요의 신이고, 고양이를 거느리고 다니지. 그것도 회색 고양이를, 떼로 말이야.”
“왜 하필이면 회색이야? 그러니까, 아스트리드, 네 말이 사실이라면 프레야가 자려고 누울 때마다 머리맡에 고티 할멈의 머리색이랑 똑같은 털 뭉치들이 웅크리고 앉아 있다는 말이겠네? 냄새는 안 난대?”
어디선가 조막만 한 돌이 날아와 터프넛의 투구를 때렸다. 너덧 발짝 뒤에서 고티 할머니와 테러블 테러들이 가만히 이쪽을 보고 있었다. 투구째로 머리를 감싸안고, 터프넛은,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같은 표정의 고티 할멈을 슬쩍 바라보다 굵은 지팡이의 끝이 자신을 향하자 아닌 척 고개를 돌렸다.
“말이 그렇단 거지. 맡아보지 않아서 모르는 거고.”
“그러니까, 맡아보기 전까지는 말이야.”
끝까지 늘어지는 터프넛의 말에 러프넛이 거들었다. 이에 질세라 고티 할머니의 발 아래에 있던 테러 한 마리가 또 조막만 한 돌을 날리며 쉭쉭댔다. 중재보다 강제 종료가 어울리는 의미도 이익도 없는 대화 방식으로, 제삼자가 끼어들지 않는 한 쌍둥이들은 얼마든지 싸울 수 있었다. 설사 상대가 제 편도 인간도 아닌 드래곤이라 할지라도.
“프레야는 풍요의 신이라고. 우리가 축제로 신나게 해 주면 버크가 더 풍요로워질 거야. 어쩌면 보답으로 멋진 바이킹을 만나게 될 수도 있고!”
오, 세상에. 피쉬레그는 설렌 듯 잔뜩 높아진 목소리로 말하더니 옆에 서 있던 미트러그를 껴안았다. 오, 세상에. 중재와 분담은 완전히 아스트리드의 몫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어린 바이킹들은 경쟁과 내기에 내빼는 법이 없고, 그렇기에 누군가는 필연적으로 고삐 역할을 해야 했다. 대부분은 히컵이었고, 히컵이 없는 그 나머지는 아스트리드였다. 의욕과 승부욕이 쉽사리 잦아들지 않는 그들에 히컵은 종종 지친 듯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으나,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보면, 사실 그리 많이 굴리지 않아도, 돌파구는 존재했다. 그들은 막연하고 복잡하지만 동시에 생각보다 단순한 면이 있었다.
“그러니까, 할 일 없으면 박치기 놀이는 그만하고 나가서 생선이나 좀 잡아 오지 그래? 태평하게 놀고 있는 걸 보면 고버 아저씨가 가만있지 않으실걸.”
제법 구미가 당기는 요구는 아니었는지, 터프넛이 탐탁잖은 표정으로 어깨만 으쓱였다.
“아니면 그레이트 홀을 장식할 꽃을 가져와도 좋고. 붉은색과 보라색 계열로 말이야. 버크를 뒤지면 끝도 없이 나올 테니까 다른 생각 할 시간도 없을걸?”
끝내 빠져나갈 구멍이 가로막혔다. 못 박듯 덧붙이는 아스트리드의 말에 쌍둥이들은 벙찐 얼굴을 잠깐 마주보다 이내 돌덩이라도 짊어진 듯 축 처진 몸으로 지플백 안장 위에 앉았다.
“왜 하필 꽃이어야 해? 해초는 안 돼? 재채기 날 것 같다고.”
“그래도 붉은색이 많은 건 마음에 들어. 우리가 이전에 한 방 먹였던 놈도 그런 색이었잖아. 승리의 색이지.”
너희가 아니라 우리겠지. 중얼거리는 아스트리드의 목소리는 결국 신나게 하늘로 도약한 그들에게 닿지 못한 채 허공에서 흩어졌다.
성질 급한 바이킹이 협력한다면 일은 빠르게 정리되는 법이다. 준비를 끝마침과 동시에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뿔피리 소리가 버크 전역에 울려 퍼졌다. 음식과 꽃이 잔뜩 쌓인 그레이트 홀에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들고, 스토익이 잔을 들고 선언하자 잔뜩 신난 함성과 함께 봄이 시작되었다.
배불리 먹고 마시며 떠드는 들뜬 목소리가 이어졌다. 사람들은 저마다 집안에서 있었던 사소한 일상을 늘어놓거나 상인 요한을 통해 얻은 귀중품을 자랑하는 등 다양한 이야기를 꺼냈으나, 점차 대화가 흘러감에 따라 도달한 화제는 지난 대전투와 스노글터그, 그리고 드래곤에 관한 것이었다. 바이킹들은 거칠지만 그만큼 다정했다. 사랑이 깊었고 동시에 잔혹하리만치 냉정했다. 그들은 그들의 가족을, 가족과 부족을 사랑했으며, 그들이 살고 있는 유서 깊은 섬을 사랑했다. 그리고 사랑하는 것들을 지키며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위협에서 벗어나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다가오는 위험과 맞서 싸우고 또 이겨야 했다. 버크에 모인 수많은 바이킹은 사랑을 위해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고민할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잠깐 뜸 들이는 순간의 차이로 사람이 죽는다. 그들의 동료가, 어쩌면 가족이 죽었으며, 슬퍼할 틈도 없이 다음 전쟁이 발발했다. 섬은 하루가 멀다하고 무기와 전쟁 기술을 갈고닦는 소리로 날을 세우곤 했다. 아이들은 책을 읽고 공부하기보다 도끼를 들고 휘두르는 법을 먼저 배웠다. 평화가 자리 잡을 틈도 없이 불이 붙고, 비명이 울리고, 사람이 떨어졌다. 그리고 그들의 평화와 안식을 방해하는 것들은, 예외 없이 전부 드래곤이었다. 짐승의 모습으로 야수의 영혼을 가진 생명체. 굶주린 악마의 자손. 인정과 자비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이성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모두가 극도로 위험했다. 그것들의 구분에 안전이란, 허상이자 신기루였다. 결코 함께할 수 없는 두 개의 개념이었다. 예컨대 유순한 바이킹, 처럼.
끝나지 않는 전란에 결국 전쟁은 그들의 일상이자 삶의 일부가 되어버렸고, 대장간은 점점 더 바빠졌으며, 사람들은 예민해졌다. 손발을 잃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고 머리가 반으로 뭉개져도 운이 좋은 축에 속했다. 어쨌거나 살아갈 수는 있었으니까. 사람들은 점차 비명을 듣는 행위, 가죽을 찢고 칼을 휘두르는 행위에 익숙해졌고, 무엇인가가 내뱉은 용암 덩어리에 누군가의 집이 타들어 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짐승의 울음소리를 듣는 것과 배를 타고 나가 그들의 시작점을 향해 항해하는 것에도 익숙해졌다. 요란하게 변하던 얼굴에는 분노와 체념의 표정밖에 남지 않았다. 살아남은 자들의 남은 시간은 맞서 싸우는 것과 항해하는 것으로 흘러갔다. 그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지만 생각하고 느끼는 것들은 비슷했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 끝없는 꼬리잡기 사냥의 반복 속에서 어쩌면 그들 모두가 전부 지쳐버렸던 건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도 도끼 하나조차 제대로 들지 못하던 히컵이 기억나네.”
“그때의 히컵은…,”
“정말 히컵이었지.”
“나는 성실했다고 말하려 했네.”
스토익의 말에 고버는 맞은편에 앉은 히컵의 얼굴을 살피며 대꾸했다. 정작 당사자는 고기 스튜를 퍼먹으며 단짝 친구와 손장난을 치느라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도끼를 힘겹게 드는 건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은 뱉지 않고 그대로 넣어두었다. 목숨을 내건 설득과 극적인 화해 끝에 얻어낸 평화를 구태여 깰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전히 스토익은 히컵을 걱정했지만 그건 해내리라는 신뢰로부터 오는 관심과 사랑의 형태였다. 이전처럼, 그러니까, 드래곤 사냥을 두고 실랑이하던 때처럼 바깥을 시도 때도 없이 돌아다니는 행동에 대한 체념이라기보다 더 이상 아무것도 잃고 싶지 않은 아버지로서의 진심이었다.
“히컵, 다리는 아직 쓸만하지? 내가 몇십 년 동안 철을 두드리던 경험을 그대로 써먹은 거란다. 아마 쉽게 고장 나진 않을 거야. 네 날개 친구가 간식인 줄 알고 씹어먹지만 않는다면 말이지.”
고버의 말에 히컵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스토익 못지않은 황소고집의 소유자인 히컵을 고버는 잘 알고 있었다. 전쟁을 비롯한 섬 안팎의 일로 스토익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동안 어린 히컵을 돌본 사람은 고버였기에,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다.
“투슬리스도 아무거나 입에 넣고 보는 성격은 아니니 안심하세요. 간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장난감인 줄 알아요.”
“요망한 것 같으니. 나는 아직도 네가 어떻게 저 드래곤을 길들였는지 의문이다. 물론 너라 가능했겠지만.”
“길들였기보다는, 친구가 된 거죠. 저도 투슬리스도 사이좋게 목표가 있었으니까요. 그렇지, 친구?”
말하며 히컵은 탁자 위로 불쑥 자리 잡은 투슬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커다란 녹색 눈이 접히며 애교를 부렸다. 고버는 신기하게도 닮은 두 얼굴을 바라보다가, 잔을 들이켰다. 가슴께부터 따뜻한 기운이 서서히 퍼져가 기분이 좋았다.
“모두, 사소한 걱정은 잊고 배불리 먹고 마시게나. 프레야가 우리에게 봄과 풍요를 선사해 주실 테니.”
스토익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열띤 환호가 그레이트 홀을 가득 채웠다. 뚜껑이 날아가 버릴지도 몰라. 생각하며 히컵은 투슬리스와 함께 몰래 웃었다.
3.
축제가 시작될 무렵엔 암석 절벽의 끝자락에 걸려있던 태양이 어느덧 수평선 밑으로 사라지고, 사람들의 열기와 대화로 후끈거렸던 그레이트 홀에서는 어른들의 이야기가 서서히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배가 얼추 차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투슬리스와 그림자놀이를 하며 지루해지는 정신을 달래던 히컵은 곁눈질로 주변의 분위기를 살피는가 싶더니 결국 추억 회상의 목소리와 나른한 웃음소리의 도움을 받아 홀을 조용히 빠져나갔다.
꽃이 피면서 봄이 찾아왔음에도 여전히 낮은 짧았다. 둘은 어두워진 하늘을 바라보며 빼곡한 별들을 배경 삼아 한적한 흙길을 걸었다. 이전과 같았다면 밤 비행도 마다하지 않았겠지만, 달이 하늘의 꼭대기에 달린 것으로 보아 시간이 늦었음과 더불어 축제 만찬과 이야깃거리로 한층 나른해진 몸을 다시 깨울 이유는 없었기에. 히컵은 느릿한 걸음을 집으로 향했다.
“오늘은 일찍 자자. 내일부터는 더 바빠질 거야. 마을 정리를 해야 하니까.”
투슬리스가 낮은 울음으로 대답했다. 히컵을 바라보는 녹색 눈에는 피곤이 서린 채다.
“걱정하지 마. 아침 비행은 할 수 있어. 언제나처럼 일찍이 끝내고 도우러 가면 되지.”
그러니까 더욱이 오늘은 일찍 자야 해. 너도 피곤하잖아. 투슬리스는 커다란 입을 움찔거리며 하품을 뱉더니 곧 나무 바닥에 엎드렸다. 본래 잠을 자는 자리도 히컵의 침대와 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투슬리스는 침대 바로 옆에 머리를 붙이고 누워 연신 낮은 소리로 그르렁댔다. 머리 위로 활짝 열어둔 창은 밤바람을 데려오고, 아직 차마 다 씻겨가지 못한 늦은 밤 기온이 나무 바닥과 투슬리스의 꼬리부터 머리를 지나 히컵의 목덜미를 훑고 지나갔다. 히컵이 침대에 걸터앉자 뻥 뚫린 창문으로 환히 들어오는 까만 하늘과 별이 눈에 가득 쏟아졌다.
“아빠는 간만에 평화로워져서 기분이 좋으신가 봐. 그럴 만도 하지, 무의미한 싸움이 사라졌으니까. 그건 나도 좋아. 다른 사람들도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고.”
투슬리스의 반쯤 감긴 눈이 히컵을 마주 보았다. 그 얼굴을 잠시 응시하자, 시선은 단순히 눈을 보는 것을 넘어 그 이상으로 뻗어나갔다. 히컵은 졸음이 가득 묻은 커다란 눈 안에서 첫 만남을 떠올렸다. 온몸으로 경계심을 표출하며 동공을 잔뜩 세운 채 떨고 있던 투슬리스의 모습을. 호기롭게 단검을 쥐고 다가갔으나 차마 죽이지 못하고 밧줄을 끊어주었던 자신을. 열다섯 히컵은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으나 결국 제 눈앞에 쓰러진 어린 생명과 겁에 질린 자신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것은 온전히 자신의 의지였다. 가족과 동료를 잃고 홀로 남아 분노와 두려움에 떨던 투슬리스가, 바이킹에 속하지 못한 채 아무리 노력해도 자꾸만 겉돌게 되는 자신과 닮았다고 느꼈다. 그들은 똑같이, 결국 모든 것이 두려울 뿐이었고, 때문에 집채보다 더 큰 괴물과 맞서 싸우는 무모함도 발휘할 수 있었다. 겁쟁이들의 무모함이 모두를 살릴 것이라고, 직전까지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설사 본인들마저도.
투슬리스는 언제나 혼자였다. 의욕에 가득 찬 고버의 수제자 히컵이 홀로 하늘에 밧줄 투석기를 쏠 때부터, 지금까지도. 잃어버린 반쪽의 꼬리날개를 되찾아주면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싶은 마음에 며칠을 고생해 가며 자동 장치를 만들어줬건만, 결국 투슬리스는 독립을 거부하고 히컵의 곁에 남기를 선택했다. 온전히 날 수 없더라도 그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너도 언젠가 삶을 함께하고 싶은 상대가 생기면 여기에 데려와. 물론 그전까지 내가 남은 나이트 퓨리를 찾아줘야 하겠지만…. 분명히 어딘가에 있을 거야.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스노글터그와 마찬가지로, 어쩌면 처음 만났을 때부터, 히컵은 줄곧 생각했다. 내가 투슬리스를 혼자로 만들어버린 건 아닐까? 분명 어딘가에 가족이 있을 텐데. 친구도 있었을 거야. 그들과 평화롭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었을 텐데···. 그런 생각에 빠져있으면 투슬리스는 어떻게 알았는지 히컵의 옆으로 슬그머니 다가오곤 했다. 고양이처럼 그르렁대는 소리를 내며. 그 말은 곧 위로이자 애교였으며 히컵은 투슬리스가 낮게 울 때마다 턱 밑을 간질여주었다. 투박하고도 부드러운 비늘 위로 손가락을 놀리다 보면 어느새 머릿속은 깨끗이 정리되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만약의 가능성을 떠올리던 생각도 의식의 저편으로 흘러가고 없었다.
“나도 네가 있어서 언제나 기뻐.”
히컵의 말에 대답하듯 투슬리스는 입을 살짝 벌려 웃으며 꼬리를 흔들었다. 그 모습에 히컵 역시 깊은 생각과 죄책감에서 빠져나와 동그랗게 뜬 눈을 보며 미소 지었다. 팔을 벌리고 끌어안은 히컵의 뺨에 투슬리스의 콧잔등이 닿았다. 동시에 고개를 위아래로 살살 흔들었다. 그러고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웃었다. 오늘은 정말 최고였어. 어제는 말할 것도 없고. 너와 함께라면 앞으로도 그렇겠지.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깊은 밤이었다. 어둠은 더 깊어진다.
*
모두가 잠든 밤, 고요는 때때로 사람을 솔직해지게 만든다. 얼큰하게 취한 바이킹들의 감성 어린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자꾸만 누군가를 그리워하게 되었다. 말을 늘어놓는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습격으로 잃은 가족과 전쟁 중에 잃은 동료를 계속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바이킹은 생각보다 정이 많다. 사랑은 누구보다 강한 그들을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존재로 만들어버리기에, 많은 것을 잃고 난 후 갑작스레 찾아온 평화에 익숙해지는 것은 어려웠다. 그리고 그건 스토익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가 기억력이 좋은 건 당신도 알고 있지? 그래서 나도 별다른 걱정은 하지 않았어.”
나른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담담히 그리움을 말하기에 적격이었다.
“그랬는데, 벌써 머리에 있는 모습도 흐려지고 있다니. 가끔은 시간이 너무 야속해. 아니면 내가 나를 너무 과신한 탓일까.”
그러나 한마디 말을 내뱉는 것조차 과분한 용기가 필요했다.
“당신에게 꼭 주고 싶은 게 있었는데 말이야. 이젠 시간이 너무 흘러서 전부 시들어버렸어.”
당신이었으면 꽃이야 다음에 또 구할 수 있으니 너무 속상해하지 말라고 말해주겠지만···. 스토익은 중얼거리며 씁쓸히 웃었다. 줄곧 모닥불을 응시하던 고개를 슬그머니 들면 아침까지 만지던 목각인형이 시선에 들어왔다.
“히컵도 벌써 많이 컸어. 이젠 열여섯이야. 참, 얼마 전에는 갑자기 드래곤을 길들였지 뭐야? 싸우지 않고 평화롭게 살 수 있다면서. 꼭 당신을 보는 것 같았어.”
신중히 고르고 골라 꺼낸 말들은 전부 모닥불의 열기에 소리 없이 타 사라진다.
“내가 처음에 얼마나 놀랐는지 당신은 모를 거야. 화도 많이 났었다고. 그렇지만 이젠 그 누구보다 자랑스러워. 우리 아들은 분명 좋은 족장이 될 거야. 그 모습을 당신과 꼭 함께 보고 싶었어.”
깊게 숨을 들이켜다 내뱉으면 호흡에 모닥불이 흔들린다. 언제나 그랬다. 불꽃보다 불같은 성격이기에 스토익은 늘 태양 아래 모든 것을 불태웠고, 온기만 남은 채 차게 식어가는 마음을 밤마다 모닥불 앞에 앉아 생각하며 정리하곤 했다. 홀로 아들과 섬을 책임지게 된 지가 어언 열다섯 해를 벌써 훌쩍 넘겼건만, 해만 떨어졌다 하면 떠오르는 사무치게 그리운 빈자리에 가끔은 눈물을 흘릴 때도 있었다.
“남은 시간도 열심히 살아가야겠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여전히 당신이 필요해.”
스토익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가장 연약하게 흔들리는 감정이 천천히 입술 너머로 미끄러져 나왔다. 족장이기에, 그리고 아버지이기에 늘 굳세어야 했건만 결국 그도 감추고 싶은 것이 있는 사람이었다. 말하기 싫은 것도, 하기 싫은 일도 있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해버렸고 얼굴 앞으로 내비치는 모습을 점점 더 강하고 엄격하게 빚어가면서 저 안쪽에 죽은 듯 살아있는 것들을 감추려 했다.
“웃기지? 족장이며 아버지라는 자가, 이렇게 나약한 소리만 늘어놓고 말이야. 아들에게는 못 할 말이 없는 것처럼 겁을 줘버렸으면서.”
그때, 그 순간에. 결국 히컵은 왼쪽 정강이를 내주고 목숨을 건졌건만, 상대라고 생각하기조차 힘든 상대와 모든 것을 내걸고 최선을 다해 싸우는 아들의 모습을, 자신은 그저 땅 위에서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텅 비어버린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마음이 요동쳤다. 그중에서 가장 큰 부피를 차지한 것은, 아무래도, 그때 그 말을 하지 말아야 했다는 후회였다. 홧김에 저지른 말치고 필요 이상으로 날카로웠다. 그러나 히컵은 잔뜩 상처받은 마음을 이끌고 끝까지 쫓아왔다. 그 안에서 보이는 발카의 모습이, 스토익을 더욱 괴롭게 만들었다.
“나는 정말….”
무엇을 하고 싶었던 걸까. 무얼 위해 여태까지 싸워왔던 걸까. 아들도 지키지 못한 마음으로, 무엇을 지킬 수 있을까.
차마 말이 되지 못한 마음이 계속해서 스토익의 머리를 덮쳐왔다. 이 이상 생각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말이지. 당신과 함께라 정말 행복했어. 히컵이 태어났을 때도, 당신과 닮은 우리 아들이기에 분명 거친 세상에서도 잘 이겨내고 강하게 크리라고 단언할 수 있었지. 당신은 언제나 강하고, 아름다웠으니까.
전하고 싶은 마음이 영혼으로부터 흘러넘쳐 차마 닿지 못할 그곳까지의 바다를 전부 메워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발카, 이 정도만 더 용서해 줘. 당신은 굳세고 다정하니까, 딱 이 정도만 부탁할게.
내가 해낼 수 있다고 말해줘.
물기 어린 눈으로 시선을 옮기면 탁자 위에 늘어진 꽃들이 가득 눈에 들어왔다. 발카와 만나고, 히컵이 태어난 이후에는 혼란 속에 헤어졌기 때문에 그 고운 손에 꽃다발을 들려줄 기회가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프레야 축제는 기나긴 겨울이 끝났음과 동시에 찾아온 봄을 축하하는 취지였다. 어린 바이킹들은 정성껏 섬을 꾸미고 축제 준비에 가담하며 프레야의 축복으로 사랑이 찾아오길 바라기도 했다. 족장으로서 섬 전체를, 아버지로서 아들을 지켜낸 스토익이 프레야에게 바랄 것은 하나뿐이었다. 평화롭고 소소한 행복을 바라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역시 바이킹이기에, 돌아가지 못할 전투를 각오해 왔다. 몇백에 가까운 횟수로 사자의 문을 향해 출항하며 다시 가지 못하는 가능성을 상상하곤 했다. 그럴 때면 머릿속에 가득 떠오르는 것은 어린 히컵과 오래전 발카의 모습이었다. 스토익은 발카를 잃은 그날부터 그녀를 찾아 홀로 해협을 누비면서도 그 누구도 탓한 적 없었다. 잘못을 묻는다면 그건 오로지 닥치는 대로 부수고 탈취하는 굶주린 괴물의 탓이었으며 그들로부터 가족을 지키지 못한 자신의 탓이었다. 곱씹을수록 더욱 명확해지는 진실에 쓴맛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계속해서 떠올리고픈 추억이 있다면, 동시에 잊고 싶은 기억도 있는 법이었다. 잊고 싶어도 계속 떠올라 결국 잊을 수 없는 순간이.
“언젠가 발할라에서 당신을 만난다면, 내가 보고 겪은 이야기를 전부 말해주지. 아마 당신도 히컵을 자랑스러워할 거야. 그 애는, 우리 아들이니까.”
붉은 꽃으로 물든 섬과 달리 탁자 위에는 노란 꽃들이 늘어져 있다. 꽃망울의 아래서부터 위로, 둥글게 감싸안듯 피어있는 모양을 바라보았다. 정리를 핑계로 손수 몇 송이 가져온, 아직 눈이 쌓여있을 무렵부터 피어나기 시작했던 이른 봄꽃이었다. 그저 자라있는 꽃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해도 의식이 안쪽으로 흐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스토익은 길게 한숨을 뱉으며 맨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섬을 감싸고 있던 어둠이 점차 옅어지기 시작했다. 이제 정말 자야 할 시간이다. 소리가 되지 못한 마음이 넘치기 전에 하루를 끝내야 했다. 꽃송이에 고정된 시선을 옮겨 얇은 막대로 모닥불을 뒤적였다. 내일이면 봄으로서 치를 첫 일이 쌓여있다. 얼마 남지 않은 장작이 전부 타버리면 불은 자연스레 꺼질 것이다. 그리고 그때쯤 해가 떠오를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스토익은 고요히 닫힌 히컵의 방문을 잠시 바라보다, 엷은 미소와 함께 방향을 틀어 방으로 들어갔다. 새로운 날이다. 휘몰아칠 수많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와, 모두에게도.